1. 삶을 긍정하는 언어: 힘에의 의지, 초인, 영원회귀, 가치 전도
힘, 의지, 긍정, 변신이라는 네 단어를 먼저 적어 둡니다. 니체의 말은 어렵게 들리지만, 바탕에는 단순한 물음이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기쁘고 강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그는 삶을 억누르는 가르침보다, 살아 있는 몸의 리듬과 기쁨을 먼저 믿었습니다. 여기서 ‘힘에의 의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무례한 힘자랑이 아니라, 스스로를 더 넓히고 더 높이는 생명의 충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제의 나를 넘어 내일의 나를 만드는 추진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이 충동이 세계 곳곳에서 서로 부딪히고 어울리며, 새로운 가치와 형식을 낳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완성된 진리를 우상처럼 모시는 대신, 늘 다시 묻고 다시 만드는 태도를 권했습니다. 그는 이 태도의 인물형을 ‘초인’으로 그렸습니다. 초인은 하늘 위 영웅이 아니라, 스스로 세운 기준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정한 잣대에 맞추기보다, 자신의 약점과 두려움을 정면으로 보고 그것을 재료로 삶을 새롭게 빚는 사람입니다. 여기에는 자기 경멸과 자만을 번갈아 넘는 긴 훈련이 들어 있습니다. 초인은 타인을 지배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먼저 자신을 다스리는 주인입니다. 이 훈련을 돕는 사유 도구가 ‘영원회귀’입니다. 지금의 선택과 행위를 무한히 되풀이해도 좋을 만큼 사랑할 수 있는가를 묻는 가상의 실험입니다. 일생이 한 번뿐이라 믿을 때는 대충 넘어갈 변명들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상상하면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습니다. 니체는 이 무서운 질문을 통해 삶을 가볍게 버리기보다,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긍정을 배우라고 권합니다. 그 긍정은 모든 것을 찬양하는 얕은 낙관이 아니라, 고통과 실패까지도 나를 변신시키는 재료로 삼는 단단한 예스입니다. 여기서 ‘가치 전도’가 이어집니다. 스스로의 눈으로 좋고 나쁨을 다시 정하는 일입니다. 남의 잣대가 오래되었다고 느껴지면, 그 잣대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에게 맞는 자를 새로 깎아 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니체의 문장은 거칠고 때로는 모순되어 보입니다. 그는 일부러 단정 대신 격언과 비유를 골라, 독자가 스스로 올라야 하는 계단을 남겨 두었습니다. 이런 글쓰기는 친절하진 않지만, 다른 사람의 사다리가 아닌 자신의 발로 서게 돕습니다. 그래서 니체를 읽는다는 것은 오래된 습관을 깨우고, 내 삶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운동과 같습니다. 그의 철학은 책장 속 이론이 아니라, 오늘의 선택 앞에 서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2. 도덕의 계보학: 원한, 금욕, 양심의 뒤편
계보, 원한, 금욕, 책임이라는 네 단어로 다음 장을 엽니다. 니체는 도덕이 하늘에서 떨어진 거룩한 명령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생겨난 힘들의 타협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도덕의 계보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긴 선과 악의 기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실마리가 ‘원한’입니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직접 이길 수 없을 때, 마음속에 쌓인 상처가 뒤틀린 평가로 바뀝니다. 힘과 활력이 넘치는 것을 ‘악’이라 부르고, 순종과 복종을 ‘선’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심리입니다. 니체는 이런 재평가가 역사적 상황에서 이해될 수는 있지만, 영원한 기준으로 굳어지면 삶을 마르게 만든다고 경고합니다. 그는 또한 ‘금욕 이상’을 비판합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삶의 충동을 억누르고, 빈칸과 침묵을 숭배하는 태도는 한때 상처받은 영혼을 지탱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길처럼 떠받들어질 때, 우리는 스스로의 힘을 의심하고 욕망을 죄로만 보게 됩니다. 니체는 고통을 미화하지도, 욕망을 방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고통을 성장의 가격으로 받아들이되, 그 고통이 누군가의 지배 도구가 되는 순간을 경계했습니다. 양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니체에게 양심은 처음부터 죄책의 채찍이 아니라, 스스로 약속한 길을 지키는 자존의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원한과 금욕이 결합하면, 양심은 자신을 학대하는 목소리로 변질됩니다. 그는 이런 변질을 알아차리고, 양심을 다시 주체의 책임과 약속으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니체의 비판은 파괴가 목적이 아닙니다. 낡은 기둥을 허물어 새로운 건물을 세우기 위한 공사입니다. 그래서 그는 독자에게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끝없이 되물으라고 요구합니다. 다수가 정한 선에 숨어 자신을 잊지 말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목표를 스스로 세우라는 권고입니다. 그 목표는 타인을 짓밟는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통과하여 얻은 기개의 형식이어야 합니다. 니체에게 윤리는 타율의 도덕이 아니라, 자기 창조의 기술입니다. 이는 버릇처럼 타인을 판단하는 눈을 거두고, 먼저 자신의 삶을 단련하는 손을 들라는 요청입니다.
3. 오해와 사용법: 위험한 문장, 읽기의 예의, 오늘의 실천
오해, 문장, 예의, 실천이라는 네 단어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니체의 문장은 공격적이고 비유가 많아, 자주 오해를 불러왔습니다. 누군가는 그의 ‘초인’을 무자비한 지배자의 표어로 읽었고, 누군가는 그의 ‘가치 전도’를 아무 규칙도 필요 없다는 방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니체가 경계한 것은 약자를 짓밟는 폭력이 아니라, 약함을 미화하는 거짓 위로와 습관적 복종이었습니다. 그는 국수주의와 편견을 비웃었고, 집단의 함성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니체를 읽을 때 필요한 첫 예의는 맥락을 살피는 일입니다. 어떤 문장은 특정 시대의 도덕과 종교, 학문을 겨냥한 비판이었고, 어떤 문장은 스스로에게 건넨 자학과 격려였습니다. 둘을 구분하지 않으면, 그의 말은 쉽게 과장되거나 축소됩니다. 두 번째 예의는 ‘나에게서 시작하는 해석’입니다. 니체는 독자가 자신의 체질과 과업에 맞추어 문장을 해석하길 원했습니다. 힘이 약한데 강한 척하는 허세도, 힘이 있는데 스스로를 묶는 자기검열도 모두 그가 비판한 표정입니다. 읽기의 목적은 남을 심판하는 칼을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정직하게 연마하는 망치를 얻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실천의 자리입니다. 니체를 일상의 작은 습관으로 번역해 보십시오. 불평과 비교에 빠질 때, 영원회귀의 질문을 조용히 떠올립니다. ‘이 선택을 내가 다시 또 할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남의 평가에 흔들릴 때, 오늘의 작은 약속을 지키는 양심을 돌려놓습니다. 무기력에 잠길 때, 몸을 먼저 깨우는 산책과 노동을 통해 생각의 바닥을 바꿔 봅니다. 또한 말의 토양을 가꾸는 일도 중요합니다. 헐뜯는 말보다 단정한 말, 중상보다 사실의 확인을 고르는 습관은 힘에의 의지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니체는 망치만 든 파괴자가 아닙니다. 그의 망치는 빈 껍데기를 두드려 울림을 시험하는 악기이자, 새 악보를 여는 박자목입니다. 너 자신의 이유로, 너 자신의 속도로, 너 자신의 형식을 만들라는 것. 이 요구를 두려움보다 호기심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남의 그림자가 아니라 자신의 걸음으로 서게 됩니다.
출처: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국내 번역본 다수), 국립중앙도서관 철학 자료, 한국철학사 관련 교양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