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다시 묻는 출발: 현존재, 세계-내-존재, 세인
현존재, 세계내존재, 세인, 돌봄이라는 네 단어를 먼저 적어 둡니다.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은 간명합니다. 우리는 매일 ‘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있다’가 무엇인지 잊고 산다는 것. 그는 이 망각을 깨우기 위해, 존재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을 ‘현존재’로 부르며 해부를 시작합니다. 현존재는 세계 밖에서 사물을 구경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이미 도구와 관계 속에 푹 젖어 살아가는 ‘세계-내-존재’입니다. 망치와 컵, 언어와 규칙은 머릿속 정의보다 손과 몸의 사용법으로 먼저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해란 관념적 목록이 아니라, 이미-그러함의 익숙함 속에서 작동하는 능숙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익숙함은 쉽게 ‘세인(사람들이 다 그러니까)’의 목소리로 굳습니다. 세인은 우리에게 평균적 의견과 말투, 안전한 태도를 건네며, 책임을 미루는 편안함을 제공합니다. 하이데거는 세인을 악으로 규정하진 않지만, 그 편안함이 나의 고유한 결정을 흐리게 만든다고 진단합니다. 이때 현존재의 구조를 꿰는 중심 개념이 ‘돌봄(자기와 세계를 향한 배려)’입니다. 우리는 늘 앞을 내다보며 계획하고(앞서-감), 이미 겪은 배경 위에서 움직이며(이미-그렇게-됨), 지금 무언가에 관여합니다(지금-관여). 이 세 가닥의 얽힘이 바로 시간의 살결이고, 존재 물음이 서는 실제 무대입니다. 하이데거는 전통 형이상학이 존재자를 분류하고 규정하는 데 몰두한 나머지, 존재가 스스로 드러나는 방식을 놓쳤다고 비판합니다. 우리가 망치의 ‘정의’를 말할 때보다 망치를 ‘사용’할 때 세계가 더 넓게 열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말보다 앞선 생활의 지평, 곧 ‘손에 잡히는 세계’입니다. 이 지평이 균열을 보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나에게-열린 방식’의 세계를 깨닫습니다. 따라서 존재를 다시 묻는 일은 사전적 답을 찾는 작업이 아니라, 내가 이미 서 있는 세계의 결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그 자각은 구호가 아니라 습관을 비트는 훈련에서 시작됩니다. 하루의 자동화된 말들—“보통 다 그렇죠”, “원래 그렇게 해요”—을 잠시 멈추고, 내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그 쓰임이 어떤 관계망과 약속 위에서 성립하는지를 더듬어 보는 순간, 존재 물음은 교과서가 아니라 생활의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시간성과 진정성: 불안, 죽음-을-향한-존재, 결단
시간성, 불안, 죽음, 결단이라는 네 단어로 다음 장을 엽니다. 하이데거에게 시간은 시계의 눈금이 아니라 실존의 구조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습관과 상처를 짊어진 채 이미-그렇게-됨으로 서 있고, 가능성을 앞에 던지며 앞서-감으로 달리며, 지금-관여 속에서 일을 감당합니다. 이 얽힘을 자각할 때 ‘나’는 단순한 점이 아니라 방향과 무게를 가진 궤적이 됩니다. 그 자각을 일깨우는 정동이 ‘불안’입니다. 두려움이 어떤 대상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면, 불안은 이유 없이 전체 세계가 낯설어지는 경험입니다. 익숙한 도구들이 잠시 말을 잃고, 세인의 목소리가 힘을 잃는 틈. 그때 ‘나는 던져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 틈에서 우리는 ‘죽음-을-향한-존재’라는 표현의 뜻을 체험합니다. 죽음은 언젠가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가능성 전체를 경계 짓는 가장 고유한 가능성입니다. 그 경계의식을 회피하면 우리는 다시 세인의 안전 속으로 미끄러지고, 받아 적기만 하는 삶으로 돌아갑니다. 반대로 죽음을 자기 가능성의 가장자리로 끌어안으면, 타인의 기대나 평균의 관행으로 미뤄 두었던 선택들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진정성(본래성)’은 특별한 영웅주의가 아니라, 유한성을 스스로 떠맡아 지금의 관계와 일을 책임 있게 이어 가는 ‘결단’입니다. 결단은 과격한 돌파가 아니라, 내 앞의 과업을 내 이름으로 선택해 수행하는 최소 단위의 실천입니다. 이를妥協(타협)과 혼동하면 안 됩니다. 세인의 요구를 무작정 거부하는 고집도, 모든 것을 흘려보내는 체념도 진정성이 아닙니다. 진정성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약속을 스스로 정하고, 그 약속을 시간 속에서 반복해 확인하는 꾸준함입니다. 불안은 그 꾸준함의 기원입니다. 불안은 나를 고독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자유롭게도 합니다. 평균의 잡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의 목록을 다시 편성할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작은 결단’의 축적입니다. 오늘의 한 약속, 한 문장, 한 통화. 그 반복이 내 삶의 리듬을 바꾸고, 리듬이 바뀌면 세계가 드러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하이데거는 이 변화를 ‘시간성의 해명’이라고 불렀습니다. 실존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주체가 아니라, 시간으로-되어-있는 방식 자체라는 뜻입니다.
기술과 드러남의 방식: 게슈텔, 사중, 머무름의 윤리
기술, 게슈텔, 사중, 머무름이라는 네 단어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후기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을 단순한 기계의 발전이 아니라, 세계가 드러나는 한 방식으로 읽습니다. 그는 기술 시대의 지배적 시선을 ‘게슈텔(정렬·소집)’이라 불렀습니다. 게슈텔의 눈에는 강과 숲, 사람과 도시는 모두 ‘비축할 자원’으로만 나타납니다. 문제는 효율 그 자체가 아니라, 효율이 유일한 의미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때 세계는 풍경과 이야기, 관계의 결을 잃고, 재고 목록으로 환원됩니다. 하이데거는 해독제로 ‘시적 사유’와 ‘예술’을 거론합니다. 사물은 혼자 존재하는 덩어리가 아니라, 땅과 하늘, 필부(죽을 이), 신의(숭고·거룩)가 얽혀 드러나는 ‘사중’의 자리입니다. 단지 하나의 물병에도 흙과 물, 축제와 기도, 노동과 갈증의 서사가 얽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얽힘을 느끼고 말할 때, 대상은 자원이 아니라 동거자(함께 거주하는 존재)로 다시 나타납니다. 하이데거의 ‘거주/머무름’은 세계를 지배하거나 방치하는 태도가 아니라, 돌보고 응답하는 태도입니다. 그는 기술을 폐기하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술의 효율과 시적 드러남을 함께 들을 수 있는 복수의 감각을 회복하자고 권합니다. 방법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이름 붙이기와 사용법을 조금 늦추고, 한 사물과 장소가 엮는 관계망을 먼저 묻는 습관에서 시작됩니다. 예컨대 나무 한 그루를 볼 때 탄소 흡수량만 계산하지 말고, 그 그늘의 약속과 동네의 기억을 함께 떠올리는 일. 기술적 계산을 멈추라는 뜻이 아니라, 계산이 가리지 못하는 결을 병기하자는 제안입니다. 그렇게 세계를 다시 복수의 목소리로 듣는 연습이 곧 ‘머무름의 윤리’입니다. 머무름은 정체가 아니라, 서두르지 않고 관계의 리듬을 조율하는 속도감입니다. 하이데거 읽기의 유익은 관념의 소유가 아니라 시선의 교정입니다. 존재 물음은 거대한 답을 요구하기보다, 매일의 말과 손짓을 조금 다르게 만드는 실천으로 남습니다. 그 작은 교정이 쌓일 때, 세계는 자원 목록에서 벗어나 다시 이야기와 초대의 장으로 열립니다.
출처: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기술에 대한 물음〉, 〈예술 작품의 근원〉, 〈인문주의에 관하여〉(국내 번역본 다수), 한국·독일 현대철학 입문서 및 강의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