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거창한 책이나 제도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테네의 골목과 광장에서 사람을 만나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이 오늘 우리가 아는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잘난 체하지 않았고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태도로 대화를 열었습니다. 이 글은 1편으로서, 소크라테스가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과 세계를 마주했는지를 삶의 배경–질문과 산파술–재판과 죽음 순서로 차분히 풀어 설명합니다.
1. 아테네와 소크라테스의 삶
소크라테스의 무대는 아테네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며 부와 문화가 모였지만, 동시에 파벌과 갈등도 심했던 도시입니다. 화려한 신전이 올라가던 때, 도시 아래 거리에서는 먹고사는 일, 정치 이야기, 소문과 논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소란스러운 현실 한복판을 걸었습니다. 귀족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는 석공, 어머니는 산파였다고 전해집니다. 어려서부터 화려한 교육을 따로 받지 않았지만, 그는 사람을 보고, 말을 듣고,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을 굳혔습니다. 말수가 적은 편은 아니었어도, 남을 눌러 이기려는 말은 피하고 질문으로 길을 냈습니다.
아테네 시민에게 전쟁은 의무였습니다. 소크라테스도 병사가 되어 전장에 섰고, 패전의 혼란 속에서도 동료를 지켰다는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말과 삶이 따로 놀지 않는 사람이라는 신뢰는 이런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집도 꾸렸습니다. 까다롭다는 평판이 붙은 아내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어느 쪽이든 확실한 사실은 그가 남편이자 아버지로도 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낮이면 광장으로 나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돈을 받고 지식을 팔던 소피스트와 달리, 그는 값을 매기지 않는 대화를 했습니다. 오늘 기준으로 보면 강의료도, 교재도, 문서도 없이 사람을 붙잡고 묻고 되묻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세상과 거리를 둔 관조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시장 가격, 법정 소식, 학교 이야기, 시민의 불만 같은 생활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철학은 손에 잡히지 않는 말잔치가 아니라, 오늘의 선택을 조금 더 바르게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대화는 늘 구체에서 출발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그는 법 조항을 늘어놓기보다 살아 있는 예를 들게 했습니다. 그러면 말은 추상에서 구체로 내려오고, 대화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의 삶은 책상 앞보다 사람 앞에 더 가까웠습니다. 철학이 삶과 떨어지면 힘을 잃는다는 사실을 그는 일상으로 증명했습니다.
2. 질문과 산파술, 무지를 인정하는 용기
소크라테스의 도구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용기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좋은 삶은 무엇인가?” 상대가 대답하면 그는 그 답이 실제 경우에도 맞는지 살펴보자고 권했습니다. 예외가 생기면 다시 정의를 고쳐 보자고 했습니다. 이 되묻기는 상대를 공격하려는 기술이 아니라, 말 속에 섞인 애매함을 걷어내려는 손놀림이었습니다. 상대가 스스로 허점을 발견하도록 돕는 과정은 산파술이라 불립니다. 산파가 아기의 탄생을 돕듯, 올바른 생각도 질문을 통과하며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심에는 무지의 자각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말은 겸손의 문구가 아니라, 배움의 문턱입니다. 알지 못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비로소 배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질문은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익숙한 정의가 흔들리면 마음이 방어적으로 굳어집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대화에는 때때로 반감과 오해가 따라붙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대화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목적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나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상대를 설득하려 들기보다, 스스로 이해하게 만들고 스스로 고치게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말은 짧아지고, 뜻은 또렷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회의나 수업에서 의견이 엇갈릴 때, 소크라테스식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금 쓰는 말의 뜻이 모두에게 같은가?”, “이 예외를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가 지키려는 원칙은 무엇인가?” 같은 물음은 대화를 공정하게 만듭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소크라테스가 정답 제공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지식을 가르치는 교사라기보다, 깨달음의 길잡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에는 명령문이 드뭅니다. 대신 “함께 보자”, “다시 정의해 보자”는 청유가 많습니다. 이런 태도는 오늘의 시민 교육에도 배울 점을 줍니다. 지식을 많이 쌓는 것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믿는가?”, “이 판단이 내 삶을 더 낫게 만드는가?” 질문이 바뀌면 삶의 방향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그의 대화는 말싸움이 아니라 삶의 연습이었습니다.
3. 재판과 죽음이 남긴 것, 시민에게 건네는 숙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은 재판과 죽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청년을 타락시켰다”, “도시가 믿는 신을 소홀히 했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섰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한편에는 그의 불편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기득권에게 질문은 종종 위협으로 보입니다. 다른 한편에는 아테네의 불안한 정치가 있었습니다. 전쟁과 정권 교체가 잦던 때, 도시는 원인을 누군가에게 돌리고 싶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떠나면 살 수 있다는 제안을 거절했고, 끝까지 진실을 따르겠다는 태도를 지켰습니다. 판결은 사형이었습니다. 그는 독배를 마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첫째, 법과 양심의 관계입니다. 그는 법정을 존중했지만, 옳음을 법의 편의에 맞추지 않았습니다. 법이 사람의 선을 지키지 못할 때, 개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크라테스는 도망치지 않고 책임을 감수했습니다. 둘째, 시민의 대화 문화입니다. 도시가 소리를 높이고 흑백으로 갈릴수록, 질문은 사라집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질문이 사라진 공동체의 위험을 보여 줍니다. 셋째, 삶과 말의 일치입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말로 해온 것을 몸으로 증명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신화가 아니라 실천의 결론으로 남았습니다.
남은 숙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끝까지 대화할 수 있는가. 내 주장에 유리한 말만 모으지 않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습관을 유지할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가 보여 준 길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직한 질문과 차분한 검토, 그리고 삶의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학교와 직장, 가족과 이웃 사이에서 이 습관을 세우면 공동체는 조금씩 건강해집니다. 소크라테스가 남긴 것은 거대한 이론이 아니라, 누구나 당장 실천할 수 있는 태도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태도를 이어 간다면, 그의 이름은 기념비가 아니라 일상의 자세로 살아 있을 것입니다.
출처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의 회상록』
국사편찬위원회, 『서양 고대사 개설』
국내 대학 교양 철학 강의 자료(소크라테스 관련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