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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학자 18편 사르트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by 로지스틱 2025. 9. 7.

사르트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출처 픽사베이)

 


실존이 먼저다: 본질, 자유, 책임, 그리고 악신앙

실존, 본질, 자유, 책임이라는 네 단어를 먼저 적어 둡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로 자신의 철학을 압축했습니다. 이미 정해진 인간의 본성이나 하늘에서 떨어진 설계도가 있고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뒤집은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정의에 맞춰진 존재가 아니라, 선택과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선택지를 마음대로 고르는 얕은 임의가 아니라, 늘-이미-선택하고 있는 구조 그 자체입니다. 회사에 남을지, 그만둘지, 혹은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을지—‘미루기’조차 하나의 선택이며,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르트르는 이 책임의 무게를 ‘버려짐’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정해진 본성이나 절대적 규범의 보호막 없이 세상에 던져졌고, 그렇기에 자유롭지만 불안합니다. 이 불안을 피하려는 심리가 ‘악신앙’입니다. 악신앙은 스스로를 어떤 역할이나 규범 속에 가두고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속이는 태도입니다. 웨이터가 자신을 ‘웨이터’라는 기능으로만 동일시하거나, 학생이 ‘나는 원래 못해’라며 가능성을 봉인하는 순간, 우리는 사물처럼 굳어집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결코 사물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존재이며, 그 연기의 방식을 바꿀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자유는 달콤한 선물이 아니라 짐에 가깝습니다. 선택은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또 다른 선택의 배경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가 공허한 방임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르트르는 자유가 세계와 타인 속에서만 구체화된다고 봅니다. 우리는 상황 속에서만 선택할 수 있고, 선택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규범의 제안으로 읽힙니다. 따라서 개인의 선택에는 은밀한 보편화의 요구가 따라붙습니다. 나의 행동이 ‘이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길을 열어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 자유는 책임으로 변합니다. 그 책임은 법적 처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과 글, 침묵과 방관이 만들어 내는 공기 전체에 대한 책임입니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도망치려 할 때마다 악신앙의 유혹을 경계하며, 실존의 고독을 견디는 훈련을 일상의 단위—말 한마디, 약속 하나, 작은 연대—에서 시작하라고 촉구합니다.

 

 

타인의 시선과 갈등: 시선, 대상화, 사랑, 지옥

시선, 대상화, 사랑, 지옥이라는 네 단어로 다음 장을 엽니다.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을 실존의 중심 장면으로 끌어옵니다. 누군가의 시선이 나를 가로지르는 순간, 나는 스스로를 대상처럼 의식하게 됩니다. 수줍음이나 수치심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의 세계 속에서 ‘무엇’이 되었음을 깨닫는 사건입니다. 이때 나는 두 방향으로 당겨집니다. 타인의 자유를 억압해 그를 사물로 만들거나, 반대로 나 자신을 사물화해 그의 기대에 맞추려 합니다. 사르트르는 이 긴장을 사랑에서도 분석합니다. 사랑은 서로를 자유로 대하는 약속이어야 하지만, 현실의 사랑은 종종 소유와 지배의 언어로 미끄러집니다. 나는 너의 자유를 원하는가, 아니면 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싶은가? 이 질문을 피하면 사랑은 쉽게 ‘역할극’이 됩니다. 한편 그는 극작에서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문장만 떼어 읽으면 혐오처럼 보이지만, 뜻은 더 미묘합니다.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자 심판의 법정입니다. 그 시선은 나를 굳게 만들 수도, 깨어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지옥이 되는 것은 타인이 본질적으로 악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사물로 만들 때입니다. 시선은 피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선을 다루는 기술입니다. 사르트르는 연극적 비유를 즐겨 씁니다. 우리는 모두 무대 위 배우이며, 서로의 관객입니다. 관객의 박수에만 매이면 악신앙의 연극이 되고, 관객을 무시하면 대화가 끊어집니다. 그는 ‘시선과 자유의 역설’을 정면으로 끌어안으라고 요구합니다.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의식하고, 동시에 나의 자유를 스스로 사물화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 결심은 예의와 규범을 거부하는 방종이 아니라, 약속을 선택하는 양심입니다. 타인의 시선이 내 선택을 규정하는 순간에도, 나는 그 규정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여전히 자유롭습니다. 그 작은 여지에서 우리는 역할을 넘겨받되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그 틈에서 대화와 연대가 가능해진다고 봅니다. 타인을 사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나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 길—그 좁은 길이 실존의 윤리입니다.

 

 

앙가주망과 실천: 문학, 정치, 일상, 그리고 해방

앙가주망, 문학, 정치, 해방이라는 네 단어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르트르는 철학이 추상적 진리를 설파하는 연단이 아니라, 현실에 개입하는 글쓰기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앙가주망(참여·개입)’을 문학의 의무로 제시했습니다. 작가의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동시에 세계에 제안합니다. 따라서 글쓰기는 책임을 동반합니다. 그 책임은 선동의 구호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모순과 인간의 자유를 동시에 드러내는 정직함입니다. 사르트르는 전쟁과 식민, 계급과 차별의 문제에 자신의 목소리를 걸었고, 동시에 어떤 집단도 절대화하지 않는 경계심을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입장과 실천은 시대에 따라 흔들렸고, 그 흔들림 자체가 실존의 곤란을 보여 줍니다. 자유의 철학이 현실에서 시험받을 때, 우리는 실패와 오류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완전한 깨끗함’이라는 환상을 거부합니다. 선택은 언제나 불완전한 정보와 모순된 요구 속에서 내려지며, 그 선택의 결과는 다시 나를 가르칩니다. 따라서 실천의 윤리는 흠 없는 정답 찾기가 아니라, 오류를 인정하고 수정하는 공개성입니다. 그는 대학 강단의 철학보다 거리의 토론을, 폐쇄적 교단보다 공개적 논쟁을 신뢰했습니다. 이때 문학과 철학은 서로의 역할을 바꿔 입습니다. 소설은 철학의 실험장이 되고, 철학은 소설의 무대를 설명하는 해설이 됩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냉소와 방임으로 흐른다는 오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유를 방종이 아니라 ‘해방의 과제’로 보았습니다. 나와 타인이 함께 더 많은 가능성을 갖도록 제도와 관습을 바꾸는 일, 그것이 앙가주망의 목표입니다. 직장에서의 작은 권한 위임, 학교에서의 발언 기회 확장, 동네의 의사결정에 주민이 참여하는 절차— 이 모든 것이 실존주의적 정치의 구체입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나 하나쯤’이라는 악신앙과 싸워야 합니다. 말을 아끼는 중립은 종종 현실의 불의를 돕습니다. 사르트르는 말의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말보다 앞선 경청과 학습의 시간을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야깃거리’로 소비하지 않으려면, 연대의 언어는 느리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실존주의의 해방은 거대한 혁명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관계의 문장을 바꾸고, 제도의 문장을 고치며, 내 습관의 문장을 손보는 작은 편집들의 합입니다. 그 편집이 쌓일 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 지옥이 아닌 창이 될 수 있음을, 자유가 도피가 아니라 해방의 기술임을 체험합니다. 사르트르는 그 기술을 삶의 언어로 훈련하자고 권합니다. 오늘의 작은 약속을 내 이름으로 선택하고, 내일의 오류를 공개적으로 고치는 습관— 그 습관이야말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문장을 현실의 문법으로 바꾸는 방법입니다.

 

 

출처: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존재와 무》, 희곡 〈닫힌 방〉, 국내 번역본 및 현대철학 입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