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어떻게 권력이 되나: 담론, 에피스테메, 진리 체제, 계보학
담론, 에피스테메, 진리체제, 계보라는 네 단어를 먼저 적어 둡니다. 푸코의 출발점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언제, 어떤 말하기의 규칙 속에서 가능해졌는가?” 그는 지식을 머리 속의 관념이 아니라 담론—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은 말하면 안 되는지, 누가 말할 자격이 있는지, 어떤 절차를 거쳐야 ‘근거’가 되는지—의 네트워크로 보았습니다. 어느 시대의 지식은 우연한 취향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바닥 규칙, 곧 에피스테메 위에서 성립합니다. 중세, 고전주의, 근대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분류하고 사람을 바라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푸코는 초기에 이를 “고고학”이라 불렀습니다. 묻혀 있던 규칙과 층위를 파내어, 지식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의 조건을 드러내는 작업이었죠. 이후 그는 “계보학”으로 방향을 틀어, 그 조건들이 어떻게 힘겨루기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해 왔는지 추적합니다. 이때 핵심 문장이 등장합니다. 권력/지식. 권력은 단순히 위에서 누르는 주권자의 명령이 아니며, 지식은 중립적 거울이 아닙니다. 둘은 서로를 생산합니다. 병원·법정·학교·관청에서 쓰이는 범주와 기준, 검사와 기록의 기술은 사람을 나누고 행동을 가늠하는 실천의 장치이며, 동시에 그 장치가 만들어 낸 분류가 곧 “사실”로 굳어져 우리를 되돌아 규정합니다. 이때 권력은 억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입니다.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병, 성숙과 미성숙의 선을 그어, 가능한 몸짓과 자아상을 만들어 냅니다. 푸코가 말하는 진리 체제란 이런 장치들이 서로 맞물려 어떤 말이 참/거짓으로 공인되는 전체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권력은 나쁘고 진리는 좋다” 같은 도식은 그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어떤 권력/지식의 배열이 지금의 나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묻고, 그 배열의 우연성을 보여 개입의 여지를 찾고자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음모론이 아니라 세부 기술입니다. 기록지, 표준화된 시험, 자격증, 통계표와 같은 사소한 실무의 형식이 어떻게 사람을 바라보는 눈과 자기 이해를 바꿔 놓았는지—푸코는 바로 그 얇은 문턱을 집요하게 비춥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자연스럽다’고 믿던 범주가 사실은 역사적 산물이며, 그렇다면 다르게 배열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비판의 긍정적 목표입니다. 지식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조건과 효과를 보아 스스로를 타인의 규정에서 조금 벗어나게 하는 기술을 배우자는 제안입니다.
규율 권력과 파놉티콘: 몸·시선·문서의 미세한 정치, 그리고 생명정치
규율, 파놉티콘, 정상화, 생명정치라는 네 단어로 다음 장을 엽니다. 푸코는 근대 사회의 권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규율 권력은 작고 가까운 곳에서 작동한다.” 왕의 칙령보다 더 치밀한 것은 병영의 일과표, 학교의 출석부, 병원의 차트, 공장의 계획표입니다. 그는 시간표·배치·검사·기록이라는 네 가지 기술에 주목합니다. 사람을 일정한 자리와 순서에 놓고, 반복 훈련으로 몸을 길들이며, 시험과 관찰을 통해 차이를 계량화하고, 문서를 통해 그 차이를 지속적으로 축적하는 것. 이 미세 기술이 모여 정상화라는 시선을 만듭니다. 평균과 편차의 언어가 일상에 스며들 때, 사람은 스스로를 평균에 맞추어 조정하거나,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관리의 대상이 됩니다. 이때 벤담의 파놉티콘—중앙 감시탑과 원형 수용실로 구성된 감옥 모델—은 하나의 은유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 건축물의 유무가 아니라, 보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주체를 자기 감시로 이끈다는 역설입니다. 교실의 창가 자리, 카드키의 출입 기록, 업무용 메신저의 ‘읽음’ 표시, 건강앱의 그래프는 우리 몸과 시간을 세세하게 측정 가능한 단위로 잘라, 스스로를 표준화하도록 압박합니다. 푸코는 여기서 더 나아가 생명정치를 제시합니다. 개인의 몸을 길들이는 규율과 더불어, 인구 전체의 탄생·질병·수명·이동을 관리하는 정책과 통계의 장치가 동시에 발전했다는 분석입니다. 예방접종, 위생, 주거, 노동시간, 출산 정책은 분명 생명을 보호하는 면이 있지만, 동시에 살게 함과 죽게 내버려 둠이라는 냉정한 선택의 논리를 내장합니다. 푸코가 의심하는 것은 보호 그 자체가 아니라, 보호의 이름으로 어떤 차별적 선별이 정당화되는가입니다. 그렇다고 그는 해방을 단순히 규율의 철폐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규율은 지식과 생산성의 증가를 낳은 양면성을 지닙니다. 그래서 그의 비판은 기계적 반대를 넘어서, 투명성·자기결정·상호감시의 역전 같은 세부 설계의 문제로 내려옵니다. 예컨대 기록을 완전히 없앨 것인가, 아니면 기록의 소유와 접근권을 개인에게 되돌릴 것인가. 표준을 폐기할 것인가, 아니면 표준의 다중화와 임시성을 제도화할 것인가. 푸코의 텍스트는 바로 이러한 설계 논의의 언어를 제공하기 위해, 감옥·병원·학교·정신의학의 역사적 도면을 하나하나 펼쳐 보입니다.
주체의 발명과 자기배려: 주체화, 진실 말하기, 그리고 저항의 기술
주체화, 자기배려, 파레지아, 저항이라는 네 단어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푸코는 말년의 강의에서 질문을 뒤집습니다.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주체”를 폭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다른 주체’가 될 수 있는가를 모색합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윤리에서 자기배려(epimeleia heautou) 를 다시 불러냅니다. 이는 오늘 유행어의 ‘셀프케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나의 작품처럼 다듬는 수련입니다. 식단·수면·독서·우정·언어 습관 같은 생활 기술을 통해 욕망을 알아차리고, 타인의 시선으로 굳은 자아상을 느슨하게 하며, 스스로 선택 가능한 실험적 삶의 형식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핵심 실천이 파레지아(진실 말하기) 입니다. 권력자에게 아첨하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며, 자기 자신과 공동체에 필요한 진실을 책임지고 발화하는 태도입니다. 푸코에게 파레지아는 도덕적 고백과 다릅니다. 고백은 제도에 나를 맞추기 위한 자기 폭로의 기술일 수 있지만, 파레지아는 관계를 재배열하는 언어 행위입니다. 그는 이것을 오늘의 시민적 실천에 연결합니다. 데이터를 요구하고, 절차의 이유를 묻고, 기준의 임시성을 드러내며, 새 규칙의 시험판을 제안하는 일—이 모든 것이 “저항”입니다. 푸코의 유명한 말,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도 있다” 는 낙관이 아니라 설계의 지침입니다. 권력은 한 점이 아니라 관계의 그물이며, 그물의 매듭마다 다른 힘의 방향이 있으므로, 저항 또한 다중적이어야 한다는 뜻이죠. 덧붙여, 푸코 읽기의 오해도 정리해야 합니다. 그는 “진리가 없다”거나 “도덕은 무의미”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리가 어떤 절차와 장치를 통해 사회적으로 성립하는가를 묻고, 그 절차를 더 개방적이고 비폭력적으로 만들자는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또한 그의 성·정치 관련 논의가 모든 규범의 해체를 옹호한다고 보는 해석도 과장입니다. 푸코는 규범의 역사성과 다양성을 강조했을 뿐, 폭력과 억압을 견디게 만드는 최소 규칙의 필요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사용법은 간단합니다. 첫째, 내가 속한 조직의 문서·평가·표준에서 누가 말할 수 있고 무엇이 기록되는지를 맵처럼 그려 보십시오. 둘째, 그 맵에서 되돌릴 수 있는 권한(열람·수정·이의제기)을 개인과 공동체 쪽으로 이동시키는 작은 장치를 설계해 보십시오. 셋째, 나와 동료의 자기배려 루틴—학습·몸·언어—을 만들어, 규율의 압박을 자기 실험의 장으로 전환해 보십시오. 푸코의 철학은 파괴의 언어가 아니라 편집의 기술입니다. 이미 쓰인 규칙의 문장을 고치고, 빈칸을 주석으로 채우며, 다른 버전의 초안을 돌려 보는 공동 작업. 그 꾸준한 편집 속에서 우리는 “다르게 살 수 있다”는 문장을 현실의 설계도로 바꿔 갑니다.
출처: 푸코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광기의 역사》, 〈지식의 고고학〉,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국내 번역본 다수), 현대사회이론·정치철학 관련 교양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