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은 미래 소득을 현재로 끌어오는 기술이고, 은행은 그 기술을 규모·만기·위험의 차원에서 조정하는 인프라다. 예금은 즉시 인출 가능한 부채이자 결제 수단이며, 대출은 장기·불확실한 자산이다. 이 불일치를 다리 놓는 기능이 은행의 핵심 수익원이자 취약점이다. 이 글은 첫째, 예대 마진과 유동성·자본 규제의 프레임으로 은행의 작동을 해부하고, 둘째, 신용 사이클이 실물·자산시장에 전파되는 경로를 정리하며, 셋째, 가계·기업·정책이 신용을 ‘예측’이 아니라 ‘한도와 복구 절차’로 관리하는 규칙을 제시한다. 목적은 금리·스프레드 뉴스가 월 상환액·투자 계획·현금 버퍼로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지 명료히 하는 데 있다.
은행의 경제학: 예대마진·만기 변환·유동성·자본의 사중 균형
은행의 수익모형은 단순화하면 예대마진(NIM)과 수수료, 그리고 트레이딩·유가증권 평가익의 합이다. 수입의 토대는 만기 변환과 위험 변환이다. 단기 예금을 조달해 장기 대출과 유가증권에 투자하는 순간, 금리·유동성·신용의 세 위험이 발생한다. 첫째, 금리 위험. 자산·부채의 재가격 주기와 듀레이션이 어긋나면, 기준금리·장단기 금리 곡선 변화에 따라 NIM이 출렁인다. 고정금리 대출이 많고 변동금리 예금이 많을수록 금리 상승기에 마진이 압박되고, 반대 조합이면 하락기에 압박된다. 둘째, 유동성 위험. 예금은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지만, 대출과 채권은 즉시 현금화가 어렵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은행은 현금·초단기 채권·중앙은행 예치금 같은 고유동성자산(HQLA)을 보유하고,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순안정자금조달비율(NSFR) 같은 규제 기준을 준수한다. 위기 시에는 예금의 민감도가 커져 ‘디지털 뱅크런’의 속도가 과거보다 빨라질 수 있으므로, HQLA의 질·분산이 생존을 가른다. 셋째, 신용 위험. 대출 채권의 부도·연체는 손실충당금의 적립과 이자수익의 감소로 연결된다. 경기 둔화·금리 상승·부동산 가격 하락은 담보가치와 원리금 상환 능력을 동시에 약화시키며, 은행의 위험가중자산(RWA)을 증가시켜 자본비율을 압박한다. 넷째, 자본. 바젤 규제 체계는 손실 흡수력을 위해 보통주자본(CET1) 등 자본비율을 요구한다. 자본은 레버리지와 성장의 제한이기도 하지만, 신뢰의 기반이자 위기의 버퍼다. 은행 경영은 이 네 축의 균형 예술이다. 마진을 키우려면 듀레이션·크레딧 위험을 가져야 하고, 안정성을 높이려면 자본·유동성 버퍼를 두껍게 해야 한다. 실제로는 ALM(자산·부채 관리) 위원회가 금리 갭·듀레이션·HQLA 구성·헤지(스와프·선도·옵션)·가격 정책을 조정하며, 신용정책위원회가 대출 기준·금리 가산·담보·약정(코버넌트)을 틀 짓는다. 문제는 ‘평시의 최적’이 ‘위기의 최적’과 다르다는 점이다. 평시에는 마진·성장 경쟁이 자본·유동성 완충을 얇게 만들고, 위기에는 같은 얇음이 증폭 작용을 일으킨다. 따라서 은행의 품질 평가는 NIM·비이자이익·비용률, 대손비용과 충당금 커버리지, 예금 안정성(소매/도매, 보장/비보장), HQLA의 질, 듀레이션·헤지 정책, CET1·RWA 밀도, 스트레스 테스트 시나리오의 보수성까지 묶어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은행은 단순한 대출 공장이 아니라, 위험의 회계사다.
신용 사이클과 실물·자산시장: 확대·축소의 비대칭
신용은 경기의 증폭기다. 확장기에는 금리 하락·스프레드 축소·담보가치 상승이 대출 문턱을 낮추고, 가계는 주택·자동차, 기업은 CAPEX·M&A를 늘린다. 은행은 경쟁적으로 가산금리를 낮추고 LTV·DSR 기준을 완화하며, 피크에 이르면 ‘수요가 아닌 공급’이 신용을 끌어올리는 구간이 나타난다. 이때 자산가격은 펀더멘털을 앞서가며 상승하고, 위험 프리미엄은 얇아진다. 그러나 충격은 대개 외생 변수—금리 급등, 원자재 가격 쇼크, 규제·세제·정책의 급변, 해외 금융 불안—로 온다. 금리가 오르고 스프레드가 벌어지면 대출 상환액이 늘어 가계의 가처분소득이 줄고, 기업의 이자보상배율이 악화한다. 동시에 자산가격 하락은 담보가치를 깎아 재담보 여력을 축소하고, 신규 대출의 기준을 급격히 높인다. 이중 압박은 지출과 투자를 줄이고, 실물은 둔화한다. 신용 축소는 확대보다 빠르고 비대칭적이다. 예금 이탈·유동성 경색이 겹치면 은행은 유동성 보존을 위해 대출을 선별적으로 축소하고, 시장은 신용이 필요한 곳에 가장 가혹해진다. 부동산·중소기업·하이일드 섹터가 먼저 타격을 받는다. 반대로 회복은 유동성 백스톱—중앙은행 유동성 공급, 예금 보호의 신뢰, 정부 보증—이 작동하고, 스프레드가 안정되며, 재고 조정이 끝나고, 고용과 임금의 하방이 멈출 때 나타난다. 이 전환은 통상 채권시장에서 먼저 감지된다. 국채 금리의 정점 통과, 신용스프레드의 피크아웃, 은행 대출태도 지수의 개선은 주식·부동산보다 빠른 신호다. 중요한 것은 신용 사이클이 ‘총량’보다 ‘분포’에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이다. 같은 금리·같은 DSR 규칙이라도, 소득 변동성이 큰 가구·레버리지 높은 기업·담보가치 의존도가 높은 섹터는 더 큰 충격을 받는다. 신용정책과 금융안정은 평균을 관리하는 일이 아니라 취약부문의 도미노를 차단하는 일이다. 취약 연결을 찾아 완충을 두껍게 하는 것이 위기 관리의 본질이다.
가계·기업·정책의 신용 설계: 한도·버퍼·복구 절차를 숫자로
가계는 대출을 ‘금리 전망’으로 결정하지 말고, ‘최대 하락 시 생존’으로 설계해야 한다. 기업은 자금의 ‘수량과 가격’뿐 아니라 ‘질’을 관리해야 한다. 첫째, 차입 구조를 고정/변동·내/외화·만기·담보/무담보의 4× 매트릭스로 분산해 한 축이 막혀도 잔여 루트가 남도록 한다. 둘째, 코버넌트 헤드룸을 분기 기준으로 관리하고, 등급·스프레드의 민감도(EBITDA -20%, 금리 +150bp, 환율 +10%)를 대시보드로 고정한다. 셋째, 운전자본은 재고·매출채권·매입채무의 회전일수로 관리해, 매출 둔화기에 현금 방어가 작동하도록 한다. 넷째, 유동성 커버리지(현금+확약형 한도/12–24개월 의무지출)를 수치로 규정한다. 다섯째, 가격·계약에 슬라이딩 조항(원자재·환율·임금 지표 연동)을 도입해 비용 충격의 전이를 제도화한다. 정책은 금융안정과 경쟁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 첫째, 예금 보호의 신뢰와 중앙은행의 유동성 백스톱(상설 대기성 대출·스왑라인)을 명확히 하되, 도덕적 해이를 줄이는 담보·금리 차등을 유지한다. 둘째, LCR·NSFR·자본 완충의 규칙은 평시에 지키게 하고 위기에 유연하게 사용한다. 셋째, 부채 취약부문(변동금리 비중이 높은 가구, 분양·개발 PF, 소상공인)에는 상환 유예·보증·재조정 프로그램을 ‘조건부·종료 기준’과 함께 설계한다. 넷째, 은행 간 경쟁과 투명성을 통해 예대마진의 과도한 확대를 억제하고, 금융소비자의 정보 비대칭(금리·수수료 비교)을 줄인다. 마지막으로 기록과 복기—가계는 대출·상환·금리 전환의 이유와 결과를, 기업은 차입·헤지·코버넌트 이벤트 로그를—를 남겨 다음 사이클의 반응 속도를 높인다. 신용은 예측의 대상이 아니라 한도·버퍼·복구의 설계 대상이다. 설계가 서면, 변동은 견딜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