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는 생명과 직결되기에 ‘시장에 맡기기’도 ‘정부가 다 하라’도 답이 되기 어렵다. 이 글은 첫째, 정보비대칭·외부효과·보험의 도덕적 해이가 얽힌 의료시장의 구조를 정리하고, 둘째, 비용–효과 분석과 지불제도의 설계를 통해 ‘더 많은 돈’이 아니라 ‘더 낫게 쓰는 돈’을 모색한다. 셋째, 고령화·만성질환 시대의 재정 지속가능성을 소득·세대·산업 정책과 함께 설계한다. 목표는 건강을 복지의 항목이 아니라 인적자본·생산성·장수 리스크 관리의 핵심 투자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의료시장 구조: 정보비대칭·보험·행태가 만드는 특수성
의료는 상품이 아니라 경험재·신뢰재에 가깝다. 환자는 진단·치료의 질을 사전에 평가하기 어렵고, 공급자(의사·병원)는 지식 우위에 있다. 이 정보비대칭은 유도 수요(불필요 검사·치료)와 과소 이용(비용 탓의 미치료)을 동시에 만든다. 보험은 위험 공유에 필수지만, 역선택과 도덕적 해이를 낳는다. 건강 상태를 정확히 알수록 아픈 사람이 보험을 선택하고, 비용이 낮을수록 과잉 이용이 유인된다. 공보험은 위험을 넓게 나눠 역선택을 줄이지만, 재정 유인을 잘못 설계하면 전체 비용이 가파르게 오른다. 민영보험은 선택의 다양성을 제공하지만, 위험 분류가 정교해질수록 취약층의 보험료가 급등하거나 배제가 발생한다. 의료의 공급은 의사 인력·병상·장비라는 상대적으로 비탄력적 요소에 의해 제한되며, 수요는 소득·연령·역학뿐 아니라 행태(흡연·음주·비만·운동)와 환경(주거·직장·교통·식품)에 크게 좌우된다. 치료의 기술 진보는 품질을 높이고 생존을 늘리지만, 가격은 “질 병행 상승”과 특허·규제 비용, 보호적 시장구조 때문에 쉽게 내려가지 않는다. 이때 비용 전가가 문제다. 병원–보험–정부–환자 사이의 가격·수가·본인부담 규칙에 따라 비용이 어느 쪽으로 밀리는지가 달라지고, 결과적으로 총지출의 기울기도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지역 격차. 도시–농촌, 대형–중소병원, 전문과–필수의료 사이의 수요–공급 불일치는 ‘접근성’의 불평등을 만든다. 결과적으로 의료시장은 실패가 구조인 시장이다. 그 실패를 줄이는 규칙(정보 공개, 표준 진료지침, 지불제도, 공공·민간의 역할 분담)이 설계를 가른다. 의료의 품질·접근·비용을 동시에 개선하는 ‘세 마리 토끼’는 어렵지만,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선택–집중–인센티브 설계는 분명히 가능하다.
비용–효과와 지불제도: 값어치 있는 치료를 고르는 규칙
돈을 더 쓰지 않고 더 건강해지는 길은 무엇에 쓰느냐에 달려 있다. 첫째, 비용–효과 분석(CEA). 치료·약제·예방의 추가 비용을 추가 건강 성과(예: QALY, 질보정 기대수명)에 나눠 ICER(증분비용효과비)로 비교한다. 각 나라·제도는 수용 가능한 ICER의 문턱을 정하고(예: 1인당 GDP의 0.5–1배 등), 그 이하의 개입부터 우선 급여화·보조한다. 둘째, 지불제도. 행위별 수가(피-퍼-서비스)는 접근성을 높이고 공급 유인을 주지만 과잉 진료 위험이 크다. 포괄수가(케이스/에피소드 기반) 는 효율을 유도하나 중증·복합 질환의 위험 조정이 어렵다. 인두제(1인당 고정) 와 성과 기반 지불(P4P) 은 예방·만성 관리의 유인을 만들지만, 위험선별·환자 회피를 막을 장치가 필요하다. 이상적인 답은 없고, 혼합 모델이 현실적이다. 필수·급성은 포괄·DRG, 만성·예방은 인두·성과 기반으로, 고가 신약은 위험분담(성과 연동 환급) 을 붙이는 식이다. 셋째, 가치 기반 구매(VBP). 병원·의료진의 결과지표(사망·재입원·합병증), 환자경험, 비용을 묶어 보상과 공개에 연결한다. 넷째, 데이터 표준과 리얼월드 근거. 전자의무기록·청구·등록·웨어러블을 연결해 치료 효과·부작용·순응도를 추적하고, 리얼월드 데이터(RWD) 로 급여·수가 결정을 업데이트한다. 다섯째, 오남용 감시와 ‘디폴트’. 항생제·영상검사·고가 소모품의 표준 사용량·적응증을 정하고, EMR의 주문 화면을 베스트 프랙티스 디폴트 로 설계한다. 여섯째, 환자 비용 보호. 본인부담 상한·고가 치료의 공동부담 차등·저소득층 감면으로 접근성을 유지하되, 비급여·선택 진료는 명확히 구분·공개한다. 가치 기반은 윤리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필요한 치료를 줄이고, 필요한 치료의 접근을 넓힌다. 핵심은 측정–공개–인센티브 의 고리다.
고령사회 재정과 건강수명: 예방·통합돌봄·산업 생태계의 삼각형
고령화는 의료·돌봄 지출을 기하급수적으로 키운다. 지속가능성을 위해선 건강수명 증대와 돌봄의 효율화, 재원 다변화가 동시에 필요하다. 첫째, 예방. 금연·절주·운동·영양·비만 관리, 예방접종, 암·치매 조기검진은 높은 비용–효과를 가진 개입이다. 직장·학교·지역 단위의 누디지(기본 옵션) 설계—계단 권장, 건강 간식, 활동적 통근—가 의료 시스템 밖에서 수요를 줄인다. 둘째, 통합 돌봄. 의료–요양–주거–복지의 사일로를 깨고, 케어 코디네이터·방문 간호·원격 모니터링·가정 호스피스를 묶어 에피소드/인두 기반 으로 지불하면 응급실·입원을 줄일 수 있다. 낙상·욕창·약물 상호작용 같은 피할 수 있는 손해를 줄이는 프로그램은 비용–효과가 특히 높다. 셋째, 디지털·AI. 만성질환의 순응도 관리, 영상·판독 보조, 트리아지, 운영 최적화에 AI를 쓰면 의료진의 희소 자원을 환자 대면·의사결정에 재배치할 수 있다. 다만 데이터 보호·책임·설명가능성의 윤리 가드레일 과 의료진 교육이 필수다. 넷째, 재원. 공보험의 기초를 유지하되, (a) 소득·자산 연동 보험료, (b) 건강행태 인센티브(프리미엄 할인·가산), (c) 고가 치료의 재보험·위험분담, (d) 장기요양의 보험–주택 역모기지–민간 보장 결합으로 분담을 분산한다. 다섯째, 산업 생태계. 제약·바이오·의료기기·디지털헬스의 임상·허가·급여 평가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데이터·표준·시험평가 인프라를 공공이 제공해 혁신의 거래비용을 낮춘다. 여섯째, 인력. 필수의료·지역의사·요양 인력을 교육·배치·보상으로 확충하고, 외국 전문 인력의 자격 상호 인정·언어 지원으로 병목을 줄인다. 마지막으로 세대 계약. 고령층의 경험·시간을 지역 돌봄·교육에 연결하고, 청년층의 부담을 완화하는 세대 교환 프로그램 은 재정과 사회적 자본을 동시에 보강한다. 건강은 비용이 아니라 성장과 포용의 인프라다. 예방–가치 기반–통합 돌봄의 삼각형이 서면, 고령사회는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생산성의 원천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