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는 흔히 성인으로 불리지만, 처음부터 단정하고 고요한 삶을 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젊은 날 그는 명예와 재능에 기대어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었고, 마음속에서는 진리와 행복을 향한 불안이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북아프리카의 히포로 주교가 되기까지의 시간은, 화려함을 좇던 세속의 성공에서 마음의 평온으로 방향을 틀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글 6편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핵심을 젊은 날의 방황과 회심, 은총과 자유 의지·사랑의 질서, 고백록과 시민론이 남긴 실천이라는 세 갈래로 풀어 설명드립니다. 전문 용어는 피하고, 오늘의 삶에서 바로 도움이 되는 생각만 차분히 정리하겠습니다.
1. 젊은 날의 방황과 회심, 불안의 얼굴을 정직하게 마주하기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 수사학에 뛰어났고, 경쟁에서 이기려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스스로가 인정하듯, 칭찬과 승리의 달콤함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밤이 되면 마음은 자꾸 비어 갔습니다. 그는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려 마니교 같은 사상에 끌리기도 했고, 도시를 옮겨가며 더 큰 무대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 모니카의 간절한 응원과 기도, 그리고 스승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만났습니다. 세상의 박수는 컸지만, 불안은 더 빨리 자랐습니다. 그는 마음속에서 “나는 왜 만족하지 못하는가, 무엇이 나를 흔드는가”라는 물음과 매일 씨름했습니다.
이 불안은 약점이 아니라 출발점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불안을 숨기지 않고 기록했습니다. 자기 합리화나 감상으로 도망치지 않고, 정직한 문장으로 마음을 꺼내 보았습니다. “내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불안합니다”라는 고백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건넨 진실한 보고였습니다. 그는 젊은 날의 사랑, 일과 명예, 친구 관계에서 일어난 실수와 교만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불안은 감추면 더 커지고, 꺼내 쓰면 길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록은 “왜”와 “어떻게”를 함께 물었습니다. 왜 흔들렸는가, 어떻게 고치겠는가. 이 두 문장이 붙으면 반성은 후회로 끝나지 않고 변화로 이어집니다.
그가 말한 회심은 과장된 감정의 폭발이 아니었습니다. 회심은 마음의 방향을 바꾸고, 습관을 고치는 일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책 읽는 방식부터 바꾸었습니다. 남을 이기기 위한 지식이 아니라 진실을 찾기 위한 독서로 돌아섰습니다. 말하기도 다듬었습니다. 청중을 흔드는 화려한 말보다 사실과 성찰에 무게를 실었습니다. 시간의 쓰임도 다시 짰습니다. 새벽에 짧은 묵상, 낮의 일, 저녁의 점검처럼 리듬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은 실천은 마음을 바깥에서 안으로, 타인의 평가에서 양심의 목소리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 방식을 배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사랑이 나와 이웃을 동시에 살리는가.” 이 질문이 다음 사상의 문을 엽니다.
2. 은총과 자유 의지, 사랑의 질서로 삶을 바로 세우기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으로 자유 의지를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언제나 올바르게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도 보았습니다. 습관과 자기 사랑, 두려움과 비교가 뒤섞이면 마음은 쉽게 치우칩니다. 그래서 그는 올바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더 깊은 도움으로 은총을 말했습니다. 은총은 사람의 책임을 지우는 말이 아니라, 선한 선택을 다시 시도하게 만드는 도우미입니다. 우리가 넘어져도 일어서는 힘, 잘못을 인정하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용기, 작은 선을 꾸준히 이어 가는 끈기가 여기에 속합니다. 자유 의지는 방향을 정하고, 은총은 지치지 않게 밀어 주는 바람과 같습니다.
이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운 기준이 사랑의 질서(질서 있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많다고 모두 선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엉킨 순서로 흐르면 좋은 것도 나쁜 결과를 냅니다. 예를 들어 돈은 삶을 돕는 도구지만, 사랑의 맨 앞에 세우면 사람과 약속을 해칩니다. 명예는 책임을 감당할 용기를 북돋울 수 있지만, 사랑의 중심이 되면 진실이 가벼워집니다. 가족 사랑은 소중하지만, 이웃의 생명을 무시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무엇을 먼저 사랑할지”를 정하는 질서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가장 먼저 진실과 선, 그다음 사람, 그다음에야 물질과 성과입니다. 질서가 서면 선택이 쉬워지고, 마음의 소음이 줄어듭니다.
그가 다룬 악의 문제도 이 질서로 설명됩니다. 악은 어떤 독립된 실체라기보다, 선의 자리에서 벗어난 결핍으로 이해했습니다. 거짓은 참이 비어 있을 때 생기고, 불의는 정의의 자리가 비었을 때 생깁니다. 그래서 악을 없애는 길은 종종 복잡한 기술이 아니라 자리를 바로 채우는 일입니다. 작은 공동체에서 공정한 절차를 세우고, 기록과 설명을 투명하게 하고, 약자의 목소리를 배치 속에 먼저 두는 것처럼요. 가정과 일터에서 “누구를 먼저, 무엇을 먼저”라는 물음을 습관으로 만들면, 많은 충돌이 줄어듭니다. 사랑의 질서는 거창한 정치 이론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표입니다. 내 사랑이 나만을 살리는지, 함께 살리는지, 오늘 바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3. 고백록과 시민론, 기록과 공동선으로 이어지는 실천
고백록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책입니다. 고백록은 타인을 설득하려 쓴 논문이 아니라, 자기 점검의 기록입니다. 젊은 날의 실수, 교만, 두려움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면서, 그는 기억–해석–결심의 순서를 밟았습니다. 오늘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하루를 마치며 세 줄을 씁니다. ① 오늘 기뻤던 일 ② 오늘 후회되는 말·행동 ③ 내일 고칠 한 가지. 이 간단한 기록은 마음을 자책이 아니라 성장으로 이끕니다. 고백록이 오래 사랑받는 이유는 감정의 강도가 아니라, 반복 가능한 연습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수를 숨기지 않았고, 성공을 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독자는 책을 덮고 자기 삶으로 돌아가 같은 연습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시민론(신국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도성의 이미지를 들었습니다. 땅의 도성은 자기 사랑을 중심에 두고, 하느님의 도성은 진실과 사랑을 중심에 둡니다. 그는 현실의 도시를 버리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실의 도시에 살면서, 공동선을 기초로 제도와 습관을 고쳐 가자고 했습니다. 공공의 자리에 선 사람은 투명한 절차를 세우고, 이익이 얽히면 자리에서 물러나며, 결정은 설명 가능한 이유와 함께 내야 합니다. 시민은 폭력 대신 절차, 조롱 대신 질문, 소문 대신 기록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국론이 오늘 남긴 실천입니다. 완벽한 도시를 즉시 만들 수는 없지만, 작은 공정을 꾸준히 쌓으면 도시의 마음은 바뀝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직자였지만, 그의 충고는 종교를 넘어 보편의 윤리로 닿습니다. 일터에서는 성과와 편의를 앞세우다 사람을 잃기 쉽습니다. 그럴 때 사랑의 질서를 떠올리면 기준이 서고, 일의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가정에서는 사랑이 가까움에 기대어 무례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럴 때 고백록식 짧은 기록이 관계를 되살립니다. 공동체에서는 의견 차이가 금세 적대로 바뀝니다. 그럴 때 시민론의 절차와 설명이 등불이 됩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친 것은 두 문장으로 모입니다. “무엇을 먼저 사랑할 것인가.” “그 사랑을 내일의 습관으로 어떻게 만들 것인가.” 순서가 서고 습관이 생기면, 불안은 서서히 가라앉고 평온은 하루의 바닥을 차지합니다. 이것이 그가 남긴 길, 불안에서 평온으로 가는 배움입니다.